SEP은 2008년 CJ오쇼핑이 런칭한 메이크업 PB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로 출발했고 최근까지도 TV 홈쇼핑으로 립스틱 등을 선보였다. 그런데 2017년 셉이 변했다. 홈쇼핑에서는 팔지 않는다. 게다가 PB가 아니라 독립브랜드다. ‘서스테이너블’이라는 컨셉으로 제품 성분부터 브랜드 디자인까지 싹 바뀐 셉,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SEP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제이앤브랜드 유지은 이사를 통해 프로젝트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여성들이 평생 85개의 립스틱을 먹는다는 광고가 충격적이다.

우리도 놀랐다. 이번 셉 리인벤팅(Re-inventing) 프로젝트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립스틱을 덧바르는데 지우는 건 딱 한번, 자기 전 세안할 때 뿐이다. 메이크업을 안 한다면 모르겠지만 계속 할거라면 성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성분문제는 모든 립스틱 메이커가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서스테이너블’, 셉이 독립브랜드로 재 런칭하며 꺼낸 화두가 생소하다. 어떤 의미인가?

‘서스테이너블’은 ‘지속가능성’을 의미하는데 특히 ‘환경 파괴없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기업의 성장 모델, 사회와 국가의 작동 방식을 뜻한다. 화장품뿐 아니라 패션,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에서 중요한 아젠다로 떠오르고 있는데, 아예 서스테이너블을 브랜드의 컨셉으로 끌어안는 사례도 많다.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스텔라 메카트니는 자신들을 ‘지속가능한 럭셔리 패션’이라고 소개한다. H&M 역시 서스테이너블을 중요한 아젠다로 다룬다. SPA가 종종 환경파괴 비즈니스로 지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지만, H&M은 친환경 화장품(Conscious Beauty), 더 쉽게 자연 분해되는 소재의 옷을 선보인다(Conscious Exclusive).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스웨덴의 드라이 데님 브랜드 누디진은 ‘서스테이너블’ 그 자체다. ‘서스테이너블 패션’이 이야기되듯 화장품에서도 ‘서스테이너블 뷰티’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전부터 스킨케어 쪽에서 자연주의, 오가닉, 비건(Vegan), 크루얼티 프리(Cruelty-free) 등으로 담론이 형성되어 왔고, 최근 들어 메이크업 쪽으로 확장되었다. 미국에서는 타르테(Tarte), RMS 뷰티, 일리아 뷰티(ILIA) 등이 유명하다. ‘서스테이너블 뷰티’가 기존 담론과 다른 점은 주제가 더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자연성분이라 피부에 안전하다’는 이야기였고, 지금은 ‘성분은 물론이고 만들고 쓰고 버리는 모든 과정을 자연에 이롭게 하자’는 것이다. 사람과 환경 모두에게 이롭게 말이다. 셉은 일단 성분을 개선하는 것으로 지속가능성을 소화하고 있다. 유해물질 개수를 점차 줄여 제로로 만들겠다는 로드맵이 있다. 그 이후는 제조와 폐기 과정이 과제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고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브랜드를 그렸다.


서스테이너블이 중요한 아젠다인 것은 알겠지만 ‘한국 시장에서도 먹힐 것이다’라고 확신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메이크업 시장을 알아가면서 ‘생각보다 니즈가 많은데?’라는 생각을 했고, 컨셉 테스트 과정에서 확신의 순간이 있었다. 황색3호나 탈크, 파라벤 등 성분에 대해 소비자들의 인식 수준이나 우려가 상당히 높고 구체적이었다. 화해 같은 화장품 성분분석 앱이나 전문가 수준의 블로거 덕택에 정보를 얻기가 훨씬 쉽다. 근데 문제는 유해물질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유해물질이 4개 들었냐 5개 들었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결국은 ‘다 유해하다 치고 발색이나 잘 되는 걸로 하자’가 된다.

우리가 보기에 성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풀어볼 시도도 못한 문제’였다. 3가지 정도 컨셉 안을 테스트 했는데, ‘서스테이너블’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100%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반은 확신 그리고 나머지 반은 의지였다고 본다. 컨셉을 숙성시키는 동안 ‘우리라도 해야 한다’,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프로젝트 팀(CJ오쇼핑과 제이앤) 안에 점점 커졌던 것 같다. ‘서스테이너블이 맞는데 너무 이른 것 같다’는 타이밍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장을 그렇게 끌고 가자는 의지가 이미 충분했고, 타이밍의 이슈를 감당하는 것조차 셉의 역할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발색이 더 좋은 립스틱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제품이나 광고를 보면 ‘서스테이너블’하면 떠오르는 관념과 상당히 다르다. 그린도 없고 자연풍경도 없다.

서스테이너블하지만 시크한 것, 이 대비가 전략의 핵심이었다. 셉이 타깃으로 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모순이기도 하다. 스터디를 하면서 밀레니얼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환경에 대한 태도가 매우 흥미로웠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은 다른 세대보다 환경에 대한 민감도가 월등히 높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이 모든 환경 이슈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재미있거나 스타일리시하게 다룰 때에만 호응한다는 점이다. 결국 SNS에 자랑할 만한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난 환경에 관심이 많아요’라는 말은 꼰대처럼 보일까봐 하고 싶어도 못 하지만, 프라이탁이나 스텔라 매카트니는 쉽다. 더 쉽게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매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스타일리시하게, 시크하게 가자고 제안했다. 누구보다 더 컬러풀하게, 컬러도 더 쨍하게,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자연주의 스킨케어는 순함을 나타내기 위해 자연 중에서도 물의 이미지나 연한 그린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컬러가 생명인 메이크업이니만큼 자연 중에서도 쨍한 컬러를 가진 것들로 이미지를 잡아갔다. 석류나 오렌지처럼 인공이라 느낄 만큼 강렬한 컬러를 상상했다. 소비자 조사 때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도 그냥 서스테이너블이어서가 아니라 ‘심지어’ 서스테이너블하다는 점이었다. 컬러도 발색도 끝내주는데 성분까지 안전한 립스틱,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셉의 컬러는 정말 화려한 것 같다. 안전하면서 이 정도까지 컬러풀한 게 가능하다면, 왜 진작 안 만들었는지 오히려 의아하다.

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걸로 안다(웃음). 유해하긴 하지만 그게 없이는 아예 빨강색이 나오지 않는 성분도 있다. 그래서 컨셉 개발 과정에서는 제품팀이 가장 힘들어했다. ‘쨍하지 않은 립스틱을 누가 사냐’며 난색을 표했다. 한편에서는 레드 계열을 포기하자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또 한편에서는 서스테이너블이니까 앞으로는 퍼 자켓도 입지 말라는 거냐라는 말도 나오고… 그때는 컨셉이 엎어질까 걱정했는데 돌아보면 ‘‘서스테이너블’이 조직으로 체화되는 과정이었구나’라는 생각이다. 논의가 격렬한만큼 컨셉은 빠르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결국 나온 제품이 정말 끝내주게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런 강렬한 레드라니. 유해성분 제로라는 목표까지는 갈 길이 멀겠지만, 지금의 셉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성분혁신, 최선의 포뮬러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며, 재미있었던 점이나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말해달라.

오늘날의 마케팅은 레퍼런스가 없다는 말을 종종 한다. 급격한 환경변화로 과거의 성공에서 배우는 게 어려웠졌다. 미래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고 또 의미도 없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본질’을 발견하는 것에 집중한다. 문제는 ‘본질’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점인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많은 전문가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인사이트를 묶어내는 과정에서 본질을 발견하고 또 컨셉을 완성해 나갔다. 화장품 업계에서 구력을 쌓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물론이고, 뷰튜버 1호로 불리는 메이크업 덕후, SNS를 활용해 뷰티 브랜드를 성공시킨 20대의 젊은 사업가 등등. 이들과 함께 메이크업의 본질과 아름다움(미 의식),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메이크업은 뭘까?’라는 다소 막연한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만의 정의를 만들어갔고, ‘메이크업은 변신’이라는 처음의 인사이트가 ‘메이크업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의 변신’이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그런 인사이트를 모아 셉의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메이크업과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진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서스테이너블하지만 시크한 것, 이 대비가 전략의 핵심이었다. 셉이 타깃으로 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모순이기도 하다. 이들은 다른 세대보다 환경에 대한 민감도가 월등히 높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들이 모든 환경 이슈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재미있거나 스타일리시하게 다룰 때에만 호응한다는 점이다.”
-제이앤브랜드 유지은 이사

셉 브랜드의 앞날을 예측해본다면?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브랜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심을 담고 있고, 또 단단하게 설계된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브랜딩은 결국 맥락이다. ‘브랜드의 맥락’과 ‘소비자의 맥락’이 맞아 떨어지면 반드시 성공한다. 우리가 흔히 소비자의 마음을 잘 읽었다고 하는 브랜드들이 그렇다. 더 나아가 ‘시대의 맥락’을 담고 있다면 물질적인 성공을 넘어 상징적인 무언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테슬라나 아이폰이 그렇다. 2008년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랜드로 출발했던 셉이 결국 이름만 남은 브랜드가 된 것도 브랜드의 맥락과 소비자의 맥락이 괴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길이 어디선가 두 개로 갈라지고 시간이 갈수록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한 일은 셉의 맥락과 소비자의 맥락을 다시 만나게 한 것이다. 거기에 시대의 맥락을 읽고 담아내려 노력했다. 브랜드, 소비자, 시대 세 가지의 텍스트를 하나로 엮는 작업이 이번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SEP Reinventing Project, 2016
Work Scope _
Consumers, Market Survey(Experts, FGD)
Millennial Generation Target Study
Concept Renewal Consulting
Slogan Message Creation
Brand Storytel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