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도 많고, 플랫폼도 넘치는 시대. 시장은 복잡하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오히려 명료한 한 마디로 정리됩니다. 바로 무엇을 언제 누구와 어떻게, 왜 먹는가를 고려한 제안, 즉 푸드와 관련된 ‘맥락의 설계’입니다. 이제 고객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제품, 새로운 제안을 담지 않은 브랜드는 간이 덜된 음식처럼 매력이 없습니다. 맛있는 먹거리가 하루만에 생산, 배송되는 시대. 맥락을 잡은 자가 미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식품제조업, 유통업 그리고 외식업계에서 맥락을 설계하는 움직임을 살펴봅니다.

식품, 문제는 맛이 아니라 TPO야

요즘은 무엇을 먹어도 내가 아는 그 맛인 경우가 많습니다. 미각의 경험치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맛 그 자체보다는 타깃, 장소, 상황을 고려한 제안이 이미 제품에 담겨있어야 차별화됩니다. 얼마 전 하이트진로는 저도 탄산주 ‘이슬톡톡’을 런칭했습니다. 이들의 타깃은 이른바 ‘알쓰’입니다. ‘알코올쓰레기’라 불리는 술을 잘 못 마시거나,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타를 이렇게 부릅니다. 작년 순하리, 자몽에 이슬 열풍이 떠올라 나오자마자 마셔봤습니다. 투명한 맥주병에 담겨 있는데, 주문하니 소주잔과 함께 줍니다. 병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주처럼 병째 마셔도 좋고, 소주잔에 따라 마셔도 좋을 패키지입니다. 그게 대단한 전략이냐고요? 알쓰는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술자리에 어울리려면 남들 소주 시킬 때 콜라 시키는 것이 민망하겠죠. 그럴 때는 이슬톡톡을 시켜 남들 소주 한잔 할 때 같이 한잔하며 분위기를 맞출 수 있습니다. 또 알쓰는 헤비한 음주자가 아니라 가볍게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캠퍼스나 한강변에서 친구들과 이슬톡톡을 맥주처럼 병째 마시며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고, 밖에서 가볍게 마시기에도 좋은 용기라는 겁니다. 마케터의 깊은 고민이었을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좋게 결과한 건지 궁금하네요. 이보다 앞서 출시된 부라더#소다는 아예 페트병을 메인 패키지로 잡았습니다. 술보다는 음료처럼 보입니다. 더더욱 가볍게, 그리고 여럿이 함께 즐기라는 제안입니다.작은 사치 품목의 하나인 와인은 요즘 다양해진 패키지가 눈에 띕니다. 잔에, 작은 팩에 또는 큰 종이박스에 담겨 있어 TPO에 따라 선택하기 좋습니다. 무엇이 혼술용이고 무엇이 캠핑용인지 혹은 파티용인지 패키지가 이미 말해줍니다.

1인 가구 혹은 외식을 대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피코크가 차별적 대안입니다. 맛도 맛이고, 메뉴도 다양하고 패키지도 훌륭합니다. 1인용 혹은 한끼 용으로 만든다는 것은 양을 적절히 소분한다는 의미 이상이 필요합니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궁상처럼 보이는 것’ 아닐까요? 적은 양이고, 간편하지만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을 주는 게 필요하겠죠. 피코크가 유명 맛집의 메뉴를 정성스러운 포장으로 담아낸 이유일 겁니다.

신선배송, 배송의 속도가 아니라 제안의 깊이가 핵심

‘신선함’은 원래 먹거리 브랜드의 화두입니다. 그러나 혁신은 식품 그 자체보다 식품을 전달하는 과정, 배송에서 일어나고 있죠. 그래서 요즘 ‘신선함’이라는 이슈는 유통이 지배합니다. 유통과정의 혁신으로 로켓배송(쿠팡), 신데렐라 배송(CJ 오쇼핑)처럼 배송 그 자체도 발전했지만, 배송의 대상도 신선식품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마트는 ‘새벽딸기’를 선보였습니다. 마트에서 어제도 아니고 오늘 수확한 딸기를 선보입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밭에 있던 그 딸기입니다. 중국의 유미왕은 신선식품을 1시간 내 배송해주는 O2O 서비스입니다. 한 고객은 주문 후 23분만에 배송을 받은 놀라운 경험을 블로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O2O 서비스인 마켓컬리, 헬로네이처, 배민프레시 등도 빛의 속도로 먹거리를 배송해줍니다. 마켓컬리는 이른바 샛별배송이라는 서비스로 밤 11시 전에만 주문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상품을 받아보게 합니다.

하루냐, 한 시간이냐, 무려 23분만이냐, 이 놀라운 속도전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가능한 서비스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랫폼의 혁신은 이렇게 빠릅니다. 그렇다면 속도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역시 ‘맥락’입니다. 신선식품의 빠른 배송을 통해 어떤 가치를 제안하는가 말입니다. 배민프레시는 ‘바쁜 현대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비전으로 말합니다. 그냥 빠른 게 아니라 바쁜 당신을 위해 요리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제품을 제안해주고, 빨리 배송해줍니다. 때문에 신선한 식재료보다는 반찬, 반조리 식품, 샐러드 도시락 등이 부각됩니다. 마켓컬리는 ‘문화’를 택했습니다. 지금은 ‘스페인’이 토픽입니다. 그들의 식문화를 소개하고, 빠에야 등 대표 메뉴의 레시피를 올려, 식재료를 선택하는 새로운 맥락을 제안합니다. 바쁜 한끼를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요리하고 먹는 일상의 행위에 새로운 즐거움을 더하는 것입니다.

헬로네이처, 언니네 텃밭, 농부펀드 등 ‘선의에 동참하는 맥락’을 제안하는 서비스도 돋보입니다. 올바른 먹거리를 지키는 생산자와 이를 지지하고 소비자, 또는 유통의 거품을 빼고 스마트하게 소비하려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구매를 제안합니다. 신선배송, 지금은 ‘속도’가 이슈를 장악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혁신이 놀랍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1시간 내 배송이 가능해진다고 하면, 어떤 서비스를 선택할까를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신선은 ‘신속’ 외에 어떤 제안을 담고 있나요?

외식, 미각을 압도하는 경험을 제안하라

외식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여가의 하나입니다. 맛은 기본이고 몸과 마음에 휴식과 즐거움을 주는 제안이 있어야 하겠죠. 스카이팜은 3개의 레스토랑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공간입니다. 특징은 도심 속의 텃밭이죠. 레스토랑 위층, 작은 텃밭을 마련해 직접 식재료를 재배합니다. 그러나 재배보다는 사람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 근교에 나가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합니다. 소셜다이닝 집밥도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외식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공간이 아니라 관계를 제공하는 플랫폼입니다. 혼자서 한끼를 때우는 사람들에게 여럿이 둘러앉자 먹고 즐기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정해진 공간과 메뉴가 없으니 아마 ‘맛’을 떠난 문제입니다. 그날의 사람들과 경험이 맛의 기억을 좌우합니다.

박찬일 요리연구가의 에세이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읽어보셨나요? 짜장면, 돈가스에서 닭백숙, 랍스터까지 요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수필집입니다(소설을 전공했던 요리사의 책입니다, 추천드립니다). 가령 닭백숙 편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입니다. 우리는 맛을 기억할까요? ‘맛있다’라는 미각의 기억은 그 때 상황에 따라 왜곡된 것은 아닐까요? 맛을 좌우하는 것은 가족과 함께 했던 평범한 밥상, 여행지에서 우연히 먹었던 길거리 음식 등 그 때의 상황, 맥락입니다. 맛보다 맥락을 요리하는 마케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