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무한도전>에 출연한 연기자 김혜자씨의 한마디는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아프리카, 정말 가보세요. 서울에서 했던 고민들이 얼마나 쓰레기 같았는지 알게 될 거에요.” 순간 ‘쓰레기’라는 단어가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기존의 가치와 고민들을 쓰레기로 여기게 되는 ‘자기부정’의 결정적 순간이 김혜자씨에겐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경험 많은 우주비행사 매트(조지 클루니)는 자신의 줄을 잘라 라이언(산드라 블록)을 살린다. 때론 브랜드에도 이같이 과감한 과거와의 결별이 필요하다.
어쩌면 브랜드들이 하는 활동들은 모두 ‘자기부정’과 ‘자기다움’의 반복적 작업이 전부다.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고객가치를 바탕으로 자기의 성공과 존재를 부정해 자기다움을 만들어가고, 또다시 조금 더 정교한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다움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반복적인 작업이 바로 브랜딩이다. 더 냉정하고 통렬한 자기부정이 결국 혁신을 만든다는 사실은 애플이, 스타벅스가, 맥도날드가 이미 보여줬다. 애플은 PC제조사가 아닌 ‘다른 사고’를 하는 기업임을,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닌 ‘제3의 공간을 제공’하는 브랜드임을, 맥도날드 역시 햄버거 비즈니스가 아니라 ‘쇼비즈니스’임을 명확히 했을 때 더욱 분명한 자기다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새해에 우리는 어떤 자기부정을 준비해야 할까?
할인마트의 차별성
‘매일 최저가(Everyday Low Price)’의 가치로 거의 모든 할인점들이 경쟁하고 있을 때 이마트는 상품할인이 아닌 ‘상품개발회사’로의 자기부정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이마트가 점포를 기반으로 한 유통업체였다면, 이제는 상품개발회사로서 전에 없던 상품을 통해 차별성을 구축하고, 세계를 무대로 상품을 발굴하겠다는 움직임을 전달한다.이마트의 변화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를 위한 조직, 브랜딩, 캠페인 등의 활동이 CEO의 진두지휘 하에 일관성 있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마트 비밀 연구소’라는 조직에 각 분야 바이어와 마케팅·디자인·품질관리 인력 등이 팀을 이뤄 상품을 개발하고 ‘52주 발명 프로젝트’가 전사적 아이디어 공모로 이어지고, 이 모든 과정들이 영상으로 제작돼 여러 매체에 공유되는 식이다. 이 방향성에는 지금껏 없던 아이디어와 상품이 소비자와 만나 항상 기대를 갖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핵심이 살아있다. 대부분의 유통사들이 기업 브랜딩과 PB브랜딩 전략을 따로따로 수립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해볼 때 이들의 자기부정은 꽤나 혁신적이다.
판매의 목표전환
얼마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 설치된 소나무 테이블이 이슈가 됐다. 100명이 동시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이 테이블은 5만년 전 뉴질랜드 자연재해로 인해 늪지대에 묻힌 후 산소와의 접촉이 차단돼 원형 그대로 유지됐던 카우리 소나무의 스토리로 더욱 더 화제를 모았다.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읽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창업정신을 되새기고 지금의 가치로 되살려 상징하기에 짧은 시간 내에 구전을 타고 체험을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대형테이블 하나만으로도 자기부정에 대한 상징성이 선언되고 가시화되는 것은 효과적이고 의미도 있다.
물론 이들이 모델로 삼은 사례는 일본기업 츠타야(TSUTAYA)의 ‘T-site’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츠타야의 자기부정이 ‘책판매가 아니라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교보문고의 변화도 창업이념을 되살리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 고객가치를 섬세하게 읽은 정교화된 방향과 메시지로 계속 이어질 때 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제네시스의 밧줄
밧줄을 잘라야 할 때는 자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경험 많은 우주비행사 매트(조지 클루니)와 초보 우주비행사 라이언(산드라 블록)은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다가 인공위성 잔해와 충돌한 후 우주를 떠돌게 된다. 점점 우주선에서 멀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매트는 울먹이며 말리는 라이언을 뒤로한 채 라이언과 연결된 자신의 줄을 잘라버린다. 최근 현대차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제네시스가 에쿠스를 편입시킨 프리미엄 브랜드로 거듭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외 판매량에서 속속 검증되고 있는 제품력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얻으며 2020년까지 고급차량 6종의 라인업이 구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과 함께 여전히 무언가 불명확하다. 제네시스의 자기부정이 무엇이었는지, ‘이전의 제네시스보다 좀 더 고급스러워졌어요’ 이외에는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결단으로 밧줄을 자르고 다시 태어난 제네시스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그리고 이 다름은 소비자들에게 충분히 납득되고 공감되는 가치로 다가와야만 한다.
성장의 변곡점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발표한 2015년 100대 브랜드를 살펴보면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뤄낸 브랜드(Top risers)들의 특성에 대한 정리가 인상 깊었다. Apple(43%↑), Facebook(54%↑), Amazon(29%↑), Adobe(17%↑). User-centricity is Part of Their DNA: 이들은 사용자(user)들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일하고, 교류하는지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브랜드의 제품과 서비스, 메시지에 담아냈다. 사용자 중심(User-centricity)을 핵심으로 브랜드들이 보다 빠르게 소비자층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진화하는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대응했다.
좋은 브랜드 관리란 현재의 성장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변곡점’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변곡점을 만드는 중심은 어김없이 ‘고객’이라는 점에 깊은 동의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각자의 브랜드에 새로운 마디를 만들어줄 변곡점을 찍을 자기부정의 준비가 됐는가? 지금까지의 계획과 성공을 ‘쓰레기’로 여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섬세하게 고객을 관찰하고 정교하게 메시지를 구축할 준비가 됐는가?